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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모음집/리에라 단편

하즈키 아가씨와 비밀일기

by 양털책갈피 2021. 12. 31.

하즈키가(家),

 

과묵한 인상의 주인어른(ご主人様),

아직은 살짝 무섭지만 친절하고 상냥한 분.

 

주인어른과 정반대, 순한 인상의 사모님,

곁에 다가가면 햇살 냄새가 나는 분.

 

두 분의 업무와 각종 집안일을 돕는

많은 고용인들.

 

그리고,

주인어른과 사모님의 소중한 아이,

하즈키 아가씨, 렌 쨩.

 

 

이 집에서의 일은

고용인들과 아가씨께 하나하나 배우고 있다.

가끔 주인어른과 사모님도 가르쳐 주신다.

 

나의 일은,

주로 아가씨를 위한 일.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부터 알아가자.

오늘은 딸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하즈키 아가씨와 비밀일기】

 

◦ 20XX년 3월 4일, 맑음

 

아가씨의 초등학교 졸업식,

아가씨는 4월부터 중학생이 된다.

 

사모님은 바쁘셔서 졸업식에 오지 못하셨다.

아가씨는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돌아가는 길에 딸기를 사갔다.

조금은 표정이 풀어지셨다.

 

 

◦ 20XX년 4월 12일, 비

 

중학교를 다니게 된 아가씨는

예전보다 늦게 들어오신다.

 

처음엔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밤에 혼자서도 잘 자고,

어린아이 티를 많이 벗었다.

 

사모님은 여전히 바쁘시다.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에 폐교했던 모교의

재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같다.

 

 

◦ 20XX년 7월 11일, 약간 흐림

 

주인어른께서 출장을 떠나셨다.

1년 정도 타지에 가있어야 한다 하셨다.

 

 

 

 

◦ 20XX년 10월 27일, 맑음

 

처음으로 사모님과 단 둘이 산책을 다녀왔다.

산책이라 해도 집 정원을 걷는 일이었다.

 

예전 사모님께 느껴졌던 햇살 냄새가

오랜만에 다시 났다.

 

 

◦ 20XX년 11월 17일, 맑음

 

사모님은 지난 정원 산책이 마음에 드셨나보다.

오늘도 같이 산책을 했다.

 

사모님은 정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하늘만 보셨다.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았다.

 

다음주가 아가씨의 생일인 건

잊지 않으셨겠지?

 

 

◦ 20XX년 11월 24일, 오전 비, 오후 맑음

 

오늘은 아가씨의 생일,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받았지만,

아가씨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은 정말 미안해하셨다.

아가씨는 자기보다 학교가 먼저라며 투덜거렸다.

 

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 20XX년 12월 12일, 맑음

 

아침에 사모님이 집무실에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다.

건강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다.

 

아가씨가 많이 놀랐다.

오늘은 아가씨가 잠드실 때까지 곁을 지켜야겠다.

 

 

◦ 20XX년 12월 13일, 흐림

 

아가씨와 외출 후 집에 돌아오니,

주인어른께서 와 계셨다.

 

사모님이 쓰러진 일 때문이었다.

사모님과 조금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주인어른은 곧장 저녁 비행기로 떠나셨다.

사모님은 화가 덜 풀리셨는지 평소랑 달리 쌀쌀맞았다.

 

나에게는 그러셔도 되지만,

아가씨께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 20XX년 12월 25일, 눈

 

크리스마스, 눈이 내렸다.

아가씨는 어린아이처럼 들떴다.

그래서일까 나도 신이 났다.

 

사모님도 오랜만에 집무실을 나와

아가씨와 함께 시간을 보내셨다.

 

아가씨는 올해 그 어떤 날보다

기뻐보였다.

 

 

◦ 20XX년 1월 4일, 맑음

 

사모님이 또 쓰러지셨다.

이번에는 아가씨께서 발견하셨다.

 

새벽 1시가 넘도록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잠에 들어야 했다.

 

 

◦ 20XX년 1월 5일, 약간 흐림

 

아가씨와 사모님이 돌아오셨다.

사모님은 괜찮다며 웃어보이셨다.

아가씨는 말 없이 곧장 방으로 가 문을 닫아버렸다.

 

 

 

 

◦ 20XX년 3월 4일, 맑음

 

아가씨와 사모님,

둘 사이가 예전같지 않다.

 

아가씨는 화가 난 것 같다.

사모님이 무리하지 않길 바라는가 보다.

 

사모님은 아가씨가 사춘기라 그런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는 분위기다.

 

어떻게 둘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

 

 

◦ 20XX년 5월 21일, 흐림

 

사모님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셨다.

이번에는 복도에 쓰러지신 걸 내가 발견했다.

 

일이 막바지라며 억지로 일하시려는 걸

고용인들이 단체로 뜯어말렸다.

 

아가씨는...

병원에 찾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 20XX년 7월 11일, 비

 

원래라면 주인어른께서 돌아오셔야 할 날,

일이 남았다며 조금 더 있다 오신다고 하셨다.

 

사모님의 이야기는 알고 계셨다.

지난 번처럼 화가 났다기 보다는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 20XX년 7월 29일, 흐림

 

아가씨와 산책 중에 억지로 병원으로 갔다.

아가씨는 사모님의 병실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내게 화가 난 눈치였지만,

화를 낼 틈도 없이 아가씨는 복도 끝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괜한 짓을 했나보다.

 

 

◦ 20XX년 8월 4일, 흐림

 

주인어른께서 돌아오셨다.

사모님도 퇴원하셨다.

 

아가씨는 사모님의 곁에서

일을 도왔다.

 

내가 모르는

둘만의 비밀이 있는 것 같다.

 

지난 번에 병원으로 끌고 가길

잘했던 것 같다.

 

 

◦ 20XX년 9월 2일, 맑음

 

아가씨가 학교를 가신 동안에

사모님과 전처럼 정원 산책을 다녀왔다.

 

어쩐지 작년보다 더 야위고 지쳐보이셨다.

말 없이 벤치에 앉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사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자기가 없어도

지금처럼 렌 쨩을 잘 부탁한다고.

 

 

◦ 20XX년 10월 20일

 

어수선한 분위기,

아가씨는 하염 없이 울었다.

 

현관 앞, 운전기사님이 메모를 흘린 채

집을 나가셨다.

 

“도쿄 종합병원, 발인 절차 확인”

 

 

◦ 20XX년 11월 24일, 맑음

 

중학교 2학년의 아가씨의 생일,

사모님 없이 보내는 첫 생일,

 

아가씨는 울지 않으셨다.

작년처럼 표정이 어둡지도 않았다.

 

그냥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 20XX년 11월 25일, 흐림

 

오늘 아가씨는 학교를 쉬었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살짝 나만 불러 방으로 들이셨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렌 쨩은 말 없이 나를 껴안고 흐느끼다

지쳐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 20XX년 3월 20일, 맑음

 

주인어른께서 아가씨께 함께 외국으로 가자고 권하셨다.

아가씨는 사모님이 남기신 학교를 지키겠다며 거절했다.

 

주인어른은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다.

사모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인어른은 냉정한 분은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믿고 있다.

 

 

◦ 20XX년 4월 14일, 맑음

 

아가씨는 요즘 사모님의 일을 마무리하고 있다.

떠나기 직전까지 일을 놓지 않던 이유가 있던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모님을 이해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렌 쨩이 무리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 20XX년 5월 17일, 맑음

 

일이 끝났다.

렌 쨩과 고용인 여럿이 해낸 것이다.

 

유이가오카 학원은 내년에 예정대로 개교한다.

 

 

◦ 20XX년 7월 3일, 비

 

하나, 둘,

집에서 사람이 떠난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미안한 표정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막내였던 어느 메이드는 현관에서 울다가 겨우 집을 나섰다.

렌 쨩의 뒷모습은 쓸쓸해보였다.

 

 

◦ 20XX년 8월 17일, 맑음

 

아침에 일어나는데 다리가 불편했다.

눈도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렌 쨩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다.

 

며칠 무리하지 않으면

금방 돌아올 것 같다.

 

 

◦ 20XX년 9월 5일, 맑음

 

렌 쨩이 학교를 간 틈에 병원에 다녀왔다.

아직 집에 남은 사람들은

다들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렌 쨩에게 비밀로 해줄 모양이다.

 

의사가 말하길,

나이 때문이란다.

 

하긴, 그 꼬마 아가씨가

지금은 정말 “아가씨”가 되었으니까.

 

 

◦ 20XX년 10월 8일, 흐림

 

그동안 신세졌던 고용인 한 분이

결국 집을 떠났다.

 

이제 고용인도 얼마남지 않았다.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어쩌면 이곳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다.

 

나의 일은

아가씨, 렌 쨩의 곁을 지키는 것이니까.

아직은 떠날 수 없다.

 

 

◦ 20XX년 11월 24일, 맑음

 

사모님이 떠나고 두 번째로 맞이하는 렌 쨩의 생일,

오늘은 주인어른도, 메이드장도, 운전기사도, 정원사도...

다른 많았던 고용인들도 없다.

 

몇 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또 다음달이면 떠날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렌 쨩을 위해 다들 밝게 웃었다.

 

 

 

 

◦ 1월 21일, 맑다가 눈

 

사모님이 학교를 그토록 사랑했던 이유를 알았다.

오늘은 남은 집안 사람들끼리 그 흔적으로 찾기로 했다.

 

2층 창고, 3층 다락방, 어쩌면 지하실 어딘가에 있을까?

나도 찾는 게 특기니까 돕기로 했다.

 

 

◦ 2월 28일, 흐림

 

지난 한 달간 온 집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 3월 15일, 맑음

 

렌 쨩은 결국 사모님의 흔적을 찾는 걸 포기했다.

대신, 학교를 지키겠다고 더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제 집에 우리 셋 뿐이지만,

렌 쨩은 강하니까,

꼭 학교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3월 29일, 맑음

 

렌 쨩이 유이가오카 학원 교복을 처음 입었다.

수줍은 듯 손을 뒤로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의 어린 시절,

하나 쨩과 똑 닮았을 것이다.

 

 

◦ 4월 1일, 맑음

 

렌 쨩의 유이가오카 첫 등교.

그런데 렌 쨩의 표정이 좋지 않다.

 

학교에서 스쿨 아이돌을 하겠다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란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하는 마음도 있다.

 

 

◦ 5월, 맑음

 

스쿨 아이돌을 하겠다던 애들이

오늘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렌 쨩이 그 애들을 보러 갔으면 좋겠다.

 

 

◦ 9월, 맑음

 

렌 쨩이 오랜만에 친구들을 초대했다.

너무 신나서 그만 부담스럽게 굴어버렸다.

 

그래도 주황빛 갈색 머리 여자애는

나를 피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누구보다 외롭고 힘들,

렌 쨩이랑 친해졌으면 좋겠다.

 

 

◦ 10월, 맑음

 

오늘, 렌 쨩이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다행이다.

 

사모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 11월

 

렌 쨩과 친구들이 있는 방앞에 엎드려 자던 중에

그 주황빛 갈색 머리 여자애가 내 몸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러게, 일을 미루지 말고

제때 했어야지.

 

 

◦ 12월

 

렌 쨩에게 가장 중요한 오늘의 무대.

 

직접 가서 응원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내 몸에 부담이 될까,

집에서 보기로 했다.

 

사야 씨의 노트북으로 본 렌 쨩은 정말 예뻤다.

 

그리고 렌 쨩의 곁에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다.

 

입으론 툴툴대지만 누구보다 정이 깊고 따뜻한 아이,

 

세상에서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명랑한 아이,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도 아이돌을 무척 좋아하는 마음이 확 느껴지는 아이,

 

음악을, 노래를, 그리고 하즈키 하나가 남긴 학교를 렌 쨩만큼이나 좋아하는 아이,

 

이제는 내가 떠났을 때,

이 집에 남게 될 렌 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떠날 생각이 없다.

 

내 일은 렌 쨩의 곁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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