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본문에 등장하는 지인들에게 실명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 본문에서 "토모리루" 라고 부르고 있지만, 평소에 (아즈나랜드 가사 때문에) "도모리" 라고 불러서 문장이 조금 어색합니다.
- 토모리루의 하차 공지가 있기 전인 10월 12일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냥 포스팅을 삭제할까도 싶었지만, 남겨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유키 세츠나 역의 쿠스노키 토모리 양(이하 "토모리루")이 선천적 질병으로 제대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것이 3rd 라이브 때부터인데, 그나마 3rd와 아즈나 팬미에선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안무를 짜고 무대에 섰다. 그런데 4th에서 솔로곡 "ヤダ!" 외에는 아예 무대에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연출로 참가했고, 당연히 갤이든 본토든 활활 타올랐다. 물론 토모리루가 울면서 소감을 말할 때, 다들 대가리 깨져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공식과 소속사를 비판했고, 앙케이트에 테러 수준의 개선 요구를 쏟아낸 결과, 5th에선 홀로 떨어져 있긴 하나 무대 위의 토모리루를 볼 수 있었다. 작지만 동작 하나하나 싱크를 따라가는 모습에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한 감정이 들었는데, 가수는 아니더라도 연극에서 무대 일을 해봤던 경험이 있어 관련 썰과 함께 후기를 쓰려한다.
1. 무대에 서지 못 한 배우
이 썰은 내가 아직 대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공무원 할 생각이라 대학 공부 따위 내다버렸던 터라, 학교 생활은 돌고돌아 동아리 활동을 향했는데, 그 동아리가 연극부였다. 내가 무대에 섰던 것은 아니고, 1~2학년 시절엔 작가팀에 소속되어 각색과 오리지널 대본을 만들었고, 짬이 찬 3학년부터는 운영팀 소속으로 매니지먼트를 했었다.
아무튼, 사건은 3학년 때 벌어졌는데, 4학년은 보통 취업한다고 나오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왕고가 되었다. 때문에 뭔가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이 오고는 했는데, 그날도 기숙사에서 애니 보고 게임 하면서 놀던 중이었다. 한참 보스 잡고 있는데 운영팀 후배 현서한테 전화가 왔다. 그것도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저기 선배님… 지금 바쁘세요?"
"왜. 뭔 일인데."
"그게… 승택이가…"
연극부는 학기 당 두 번의 공연, 공연 당 두 개의 무대, 합 네 개의 무대를 정기적으로 올리는데, 그 중 오리지널 각본의 멀티맨 1담당 승택이가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곧바로 ㅈ됐음을 감지하고 기숙사를 나서 동아리실로 갔는데, 승택이 그 놈은 병원에 있고, 해당 각본으로 같이 무대에 서는 애들 전원이 소집되어 대책을 논의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병원에 간 후배들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 왼쪽 다리 골절
- 오른쪽 팔꿈치 인대 파열
- 그외 타박상
- 무대에 서긴 힘듭니다.
당장 무대 서야 될 놈이 다리몽둥이 하나와 팔 한 짝을 분지르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게다가 하필 승택이가 멀티맨이라 대체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감초 역할을 하는 배역들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웃기는 재능이 필요한 멀티맨을 무대 뒤에서 암약하는 연극부 멤버들에게 쥐어줄 수도 없고, 다른 무대의 인원들을 차출하기엔 멀티맨의 대사량이 어마무시했다. 시간상 연습에 바로 투입해도 그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지 문제였다.
그래서 대책은 크게 두 가지로 좁혀졌는데, 하나는 멀티맨 배역을 줄이는 방향으로 대본을 고치거나, 다른 하나는 멀티맨이 맡은 단역들을 갈가리 찢어 단역 5명을 추가로 투입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당연하지만, 대본을 고치는 것보다는 단역 투입이 더 쉬웠고, 무엇보다 각본팀의 반대가 컸다. 그렇게 백승택 배우의 멀티맨은 오체분시 되어 5명의 1, 2학년으로 구성된 단역배우들에게 돌아갔다.
2. 잘못은 잘못이고 아쉬움은 아쉬움
결론부터 말하면 일단 무대는 나름 잘 돌아갔다. 조금 얼타고 대사 절고 하는 건 있었지만, 긴급투입된 소방수들로 이 정도 했으면 선방이었다,
…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본 공연 날에 승택이 그 놈이 휠체어 끌고 어째저째 찾아왔는데, 한참 무대 진행 중에 나한테 그 소리를 했다.
"내 잘못으로 다친 거긴 한데... 내년에 군대 가는데 ㅅㅂ... 다음에 할 수 있겠죠?" 2
승택이는 공연업계나 연예계로 나가고 싶어하는 애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기계과 공대생이고, 지금은 의료기기 만들고 있다. 그런 사람이, 인생에서 잠깐 스쳐가는 무대에도 미련을 가지는 걸 보고, 당시에는 그냥 미친놈이지만 성실하구나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그 무대 위에 내가 없다는 것에 상실감이 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당시에는 2차 가해 수준으로 잔소리를 했는데, 다친 경위가 어처구니없어서였다. 우리 학교에는 큰 분수대 연못이 하나 있고, 그쪽 주변 차도에서 스케이드보드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동아리가 있다. 승택이는 거기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녀석이었고, 그 놈이 다친 이유도 그거였다.
대충 이렇게 생겼는데, 본부 건물에서 분수대까지의 길이 내리막길이다. 낮에는 차도 많이 다니고 사람도 많아서 잘 안 보이지만, 해만 지면 거기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새벽 2시고 3시고 계속 난다. 승택이는 거기서 인라인을 탔는데, 이 미친놈이 뭔 생각이었는지, 본부 건물 앞에서 출발해 내리막으로 달릴 생각을 한 거다.
그리고 자기 속도에 못 이겨서 저런 동선을 그리며 분수대로 다이빙을 했다는 것이다. 제 딴에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열심히 비틀었다는데, 덕분에 스무스하게 들어가거나, 방지턱에 막혀 멈출 것을 우당탕 구르며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빠지기 직전에 짚은 땅바닥에 팔이 꺾여 인대를 다쳤다.
지금도 이걸로 갈군다면 갈구는 애들이 있는데, 3어쨌든 수습도 했고, 본인도 아쉬워했으니 더 이상 놀릴 거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선례가 있었으니, 배우들에게 몸 다치지 말라는 말은 우리 밑으로 계속하고 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3. 토모리루의 잘못도 아닌데, 책임은 토모리루가 지고 있다
배제는 배려가 아니다.
- 연극부 작가팀 동료, 이선생
그래서 이 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평범한 사람도 무대에 올라야 했던 때에 오르지 못하면 굉장히 슬퍼한다, 뭐 그런 얘기다. 그리고 일반인도 그렇게 느끼는데, 연예계 종사자인 토모리루는 오죽하겠냐는 것이다. 아즈나 팬미와 4th 라이브 직후, 토모리루에게 비난의 화살이 가는 것을 볼 때 분노보다 걱정이 먼저 들었다. 캐릭터에 대한 애착, 시리즈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에 자책할 필요도 없는 일에 괜한 자책을 할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당장 자기가 맡은 세츠나의 인기에 부흥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토모리루였기에 더욱 그랬다.
토모리루가 무대에 서지 못했던 이유는 본인이 사고를 쳤거나 부주의해서가 아닌 "선천적인 체질과 질병" 때문인데, 그 책임은 전부 토모리루가 지고 있다. 공식과 소속사(SMA, 스마)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기싸움을 하는 것인지, 3rd와 아즈나팬미, 4th의 무대는 그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축소와 개선이 아니라, 그냥 토모리루를 무대에서 빼버렸다. 왜 공식과 소속사가 치킨게임을 하는데, 그 차에는 토모리루와 세츠나가 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대에 서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은 누구보다 캐스트 본인이 가장 크게 느낀다. 이에 더해 토모리루는 동료와 팬들에 대한 미안함, 앞으로 세츠나를 연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도 홀로 견디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것을 공식과 소속사가 알았다면 개선을 해야 했을 것이고, 몰랐다면 캐스트를 고용하고 매니지먼트할 자격이 없다. 일개 대학 동아리도 상황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는 마당에, 억 단위의 돈을 그냥 굴리는 두 기업이 캐스트를 방패 세워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건 직무유기다.
4th 토모리루의 감상은 팬들에게, 멤버들에게, 세츠나에게, 그리고 토모리루 자신에게 하는 말보다는 공식과 소속사에게 하는 말로 생각했다. 전부 다 할 수는 없다, 그건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와달라,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양심 없는 놈들이 맨날 눈나라고 불러서 그렇지, 토모리루는 99년생이다. 2022년 기준 한국으로 치면 올해 막 대학 졸업한 사회초년생이다. 그런 애한테 무슨 베테랑의 대처와 평정심을 바라나. 아무리 어른스럽고 내면이 단단하다 해도, 애는 애다. 나이 먹은 물붕이들보다 이룬 것도 많고 명성도 있겠지만, 그 속은 그냥 23살 애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경험도 쌓고 성장하고, 때로는 고집도 부리고 그럴 나이다. 그 고집이 자신이 "다이스키" 하는 캐릭터와 작품에서, 더 "유키 세츠나" 다워지는 것뿐인데, 왜 팬들은 분노하고, 안타까워해야 하고, 캐스트는 슬퍼하고 미안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까지가 4th 라이브까지의 생각이었다.
4. 다시 무대 위로
5th, 토모리루가 무대 위에 있었다. 멤버들과 따로 떨어져 계단 위에 서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작지만 안무를 따라가며 멤버들과 호흡을 맞췄다. 카메라가 돌아올 때 환하게 웃기도 하고, 살짝 뚱한 표정으로 노래하기도 하고, 무대 뒤의 토모리루를 본 적이 없지만, '아마 저런 표정으로 노래해오진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개인 명의의 콘서트에서 슬로우 락을 부를 때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짐작하지만, 이제 무대 위에 토모리루가 있으니 그건 중요치 않다 생각했다.
당장 라이브를 즐길 때는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잘 조절해서 무대에 임했으면 했다.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1일차 라이브가 끝나고, 아카이브를 돌려보며 내가 함부로 토모리루의 한계를 정해두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토모리루는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냥 믿기로 했다.
걱정과 재단 대신에 무대에 다시 설 준비를 해온 토모리루를 맘 편히 응원하기로 했다. 빅토리로드 때 도야가오로 라이트를 돌리고, 2층에 올라온 멤버들과 하이터치를 하는 것처럼 여과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에 박수치고 환호하면 됐다. 2일차,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3일차가 되었을 때는 첫날보다 더 편안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4일차에는 아예 도키런 무대에도 나와 (옆으로 빠져있긴 했지만) 안무도 같이 했다.
토모리루가 옛날로 돌아왔다고 말하기엔, 웬지모를 비장함과 그간의 사연이 있어서 어폐가 있다 본다. 당연히 1st와 2nd 때보다 성장한 것도 있으니, 진짜 꼬마애던 시절로 돌아왔다고 말하면 그건 그거대로 결례일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또 감내하는 그런 아티스트로 무대에 서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혹시라도 또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불러도 이해할 것이고, 그럼에도 이제는 쭉 무대 위에서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어떤 형태로든 토모리루를 계속 응원할 것이란 것,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있다면 나보다 토모리루가 훨씬 힘들테니 그런 비극은 더이상 없길 바라는 것, 이 두 가지이다.
아무쪼록, 우리 토모리루는 앞으로 쭉 행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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